[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운명의 느티나무
세월이 시간의 묵은 때를 벗긴다. 느티나무는 덩치만 크게 자란 게 아니다. 세월따라 나이테가 생긴다. 나무를 가로로 자르면 짙은 색의 동심원이 보이는데 나이테로 연륜(年輪)을 짐작할 수 있다. 보통 1년에 하나씩 고리가 생겨 나이테를 만드는데 성장기 동안 갑자가 기온이 내려가거나 성장 말기에 기온이 올라가면 거짓 나이테를 만들기도 하고 생장조건이 열악하면 나이테가 형성되지 않기도 한다. 배수가 잘되고 완만한 비탈에 자라는 나무는 나이테가 뚜렷하고 너비도 잘 구별되는데 비해 가파른 절벽이나 바위산에 자라는 나무들은 나이테가 한 해에 하나씩 생기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계곡이나 강둑에 자라는 나무들은 수분이 충분해 나이테가 고르게 자란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환경이 좋아야 정상적으로 성장한다. 비탈이나 절벽에 자라는 나무들은 죽을 힘을 다해 몸을 벼랑에 붙인다. 죽기 살기로 버티며 목숨을 부지한다. 사는 것이 힘들고 벼랑 끝에 매달릴 힘조차 없어도 움켜쥔 생명의 ‘목숨줄 포기하지 마라’한다. 벼랑 끝에 핀 이름 모를 들꽃은 작은 손을 큰 바위 가슴에 얹고 자란다. 천길 절벽 아래 떨어져 흩날리는 낙화 되지 않으려고 움켜진 손 놓지 않는다. 삼국유사에 실린 ‘백제고기(百濟古記)’에 의하면 백제 의자왕은 한 때 신라를 쳐서 천하에 성세를 높인 군주였지만 정사는 돌보지 않고 망해정(望海亭)에서 궁녀들과 향락에 빠진다. 백제 용장 계백(階伯)은 군사 5000을 이끌고 신라 무열왕과 김유신, 나당연합군과 결전을 벌렸으나 패배하고 왕은 웅진성으로 달아난디. 수많은 궁녀들은 슬피 울며 적군에게 굴욕을 당하느니 깨끗하게 죽는 것이 옳다며 대왕포(大王浦)높은 바위에서 치마를 뒤집어 쓰고 사비수 깊은 물에 몸을 던진다. 이승에서 서리 맺힌 한이 저승에서 하얀 꽃잎으로 흩날리는 풍경을 화폭에 담을 수 있을까. 느티나무의 꽃말은 ‘운명’이다. 운명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이다. 이미 정해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를 말한다. 영어로 운명을 ‘Destiny’로 적으면 행동에 의해 결과가 결정된다는 인과적인 운명을 말하고, ‘Fate’는 이미 정해져 있어 어쩔 수 없는 숙명을 뜻한다. 마을의 수호신인 느티나무는 마을에서 일어나는 흉사와 길사, 기막힌 일들을 모두 듣지만 까치들이 둥지를 틀어도 입밖에 내지 않는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추운 겨울 건너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오랜 가뭄 이겨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중략) 돌아보면/ 아득하지 않은 길이 어디 있으랴/ 어질병의 현기증 일던 모진 시련 없었으랴 (중략) 사람의 아이가 자라나서 아버지가 되어가는 일/ 세상의 한 하늘을 넉넉하게 받쳐줄/ 기둥을 세운다는 일이다’- 박남준의 ‘젊은 느티나무’ 중에서 라틴어 ‘아모르-파티(amor fati)’는 독일 철학자 니체의 운명관을 나타내는 단어로 ‘운명에 대한 사랑’이란 뜻이다. 운명에 매달리지 않지만 맞장 뜰 용기도 없다. 나이 들면 세월이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서도 목숨 건 적 없어 지난 날들이 부끄럽지만, 세월이 허리에 감아준 나이테를 센다. 낭떠러지던 평지던 운명의 말이 이끄는 마차의 고삐를 놓지 않는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느티나무 운명 수호신인 느티나무 거짓 나이테 신라 무열왕